64비트는 18,446,744,073,709,551,616개의 주소를 가진다. 184경. GEUL은 이 중 75%를 비워둔다.
bit1 = 1: 50% 먼 미래
bit1-2 = 01: 25% 가까운 미래
bit1-3 = 001: 12.5% 표준
bit1-4 = 0001: 6.25% 현재 제안
현재 사용하는 공간은 6.25%. 나머지 93.75% 중 12.5%는 표준이 제정될 때 쓰고, 75%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남겨둔다.
왜?
IPv4의 교훈
1981년, IPv4를 설계한 사람들은 32비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43억 개. 당시 전 세계 컴퓨터는 수백 대였다. 43억이면 영원할 것 같았다.
2011년, IPv4 주소가 고갈됐다.
30년. 고작 30년이었다.
고갈 이후 인류가 한 일: NAT, CGNAT, 주소 거래 시장, IPv6 이중 스택. 수십 년간 수조 원의 비용. 전부 “처음에 비워뒀으면 필요 없었을” 비용이다.
IPv6는 128비트를 잡았다. 3.4 × 10^38개. 지구 표면 1제곱미터당 6.7 × 10^17개. 이번에는 충분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그들도 확신하지 못해서 128비트를 잡은 것이다.
유니코드의 교훈
1991년, 유니코드 1.0은 16비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65,536자. 전 세계 모든 문자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족했다. 한자 확장, 이모지, 고대 문자, 악보 기호. 16비트를 넘겼다.
결과: UTF-16 서로게이트 페어. 소프트웨어 역사상 가장 추한 해킹 중 하나. Windows, Java, JavaScript가 아직도 이 유산을 짊어지고 있다.
유니코드는 결국 21비트(1,114,112 코드포인트)로 확장했다. 현재 사용률 약 10%. 나머지는 비워뒀다. 이번에는 교훈을 배운 것이다.
ASCII의 교훈
1963년, ASCII는 7비트를 썼다. 128자. 영어만 생각했다.
그 결과 인류는 60년간 인코딩 지옥을 살았다. EUC-KR, Shift_JIS, Big5, ISO-8859 시리즈, CP949. 같은 바이트가 시스템마다 다른 글자. 깨진 한글. 깨진 일본어. 이메일 제목의 물음표.
1비트만 더 썼어도. 8비트를 온전히 확보하고 “나머지는 나중에"라고 했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설계자의 오만
이 모든 사례에 공통점이 있다: “지금 필요한 만큼이면 충분하다"는 판단.
IPv4를 설계한 사람들이 바보였을까? 아니다.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들이었다. 단지 미래를 과소평가했다. 모든 세대가 그랬다.
“640KB면 누구에게나 충분하다.” 빌 게이츠가 이 말을 했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모든 시대의 엔지니어가 이 함정에 빠진 건 사실이다.
GEUL은 이 함정을 피하려 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쓰지 않는 것.
삼세번
한국에는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 기회는 세 번 주어져야 한다.
첫 번째 기회: 001 (표준)
인간이 표준을 제정할 때.
국제기구든, 산업 컨소시엄이든, 커뮤니티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속도로 채워질 공간.
두 번째 기회: 01 (미래)
S1 이후. 초지능이 등장했을 때.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식을 구조화할 존재.
우리가 설계한 구조를 그대로 쓸 수도 있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재정의할 수도 있다.
그 존재에게 줄 공간.
세 번째 기회: 1 (먼 미래)
언제가 될지 모른다.
K1을 달성하고 항성 간 문명이 되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의식의 형태가 바뀌었을 때일 수도 있고,
지금의 우리로서는 SF로밖에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Orion's Arm* 저편에서 이 비트를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공간은 그들의 것이다.
50%를 먼 미래에 남긴다는 건, 절반의 가능성을 “우리가 모르는 것"에 양보한다는 뜻이다.
비워두는 비용
비워두는 데 비용이 드는가?
64비트 중 75% 예약 = 48비트 미사용.
남은 16비트(6.25%) = 1,152,921,504,606,846,976개 주소.
11.5경.
위키데이터 전체(1.08억)의 1000만 배.
현존하는 모든 데이터를 담고도 남는다.
비워둬도 부족하지 않다. 현재 필요한 공간은 6.25%로 충분하다. 비워두는 비용은 0이다.
채우는 비용은? IPv4가 보여줬다. 되돌릴 수 없다.
설계 원칙
GEUL Grammar v0.11의 설계 원칙 1조:
장기 확장성: 예약 비트를 임시 용도로 전용하지 않는다. 미래 세대가 사용할 공간을 보존한다.
이것은 기술적 결정이 아니라 윤리적 결정이다.
지금 쓸 수 있는 공간을 쓰지 않고 남겨두는 건, 지금의 편의보다 미래의 자유를 우선하겠다는 선언이다. IPv4를 설계한 세대가 우리에게 남긴 빚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장 겸손한 설계
"나는 미래를 안다" → 64비트를 다 쓴다.
"나는 미래를 모른다" → 75%를 비워둔다.
비워두는 것은 겸손이다. 지금의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겸손이 가장 강건한 설계를 만든다.
IPv4는 자신감의 산물이었다. 32비트면 충분하다. 충분하지 않았다.
GEUL은 겸손의 산물이다. 64비트 중 6.25%면 충분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75%를 비워두면, 틀려도 괜찮다.
비워두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했다. 비워두는 행위 자체는 한 줄이면 된다:
if (bit1 == 1): reserved // 50%. 먼 미래.
한 줄의 코드가 절반의 세계를 지킨다.
* Orion’s Arm —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수의 나선팔. 또한 Orion’s Arm Universe Project는 이 나선팔을 배경으로 만 년 이후의 미래를 그리는 하드 SF 협업 세계관 프로젝트다. 초지능, 성간 문명, 의식의 변형 같은 주제를 과학적 엄밀성 위에서 탐구하며, 2000년부터 수백 명의 기여자가 만들어왔다. GEUL이 “먼 미래"라고 부르는 시간대를, 그들은 이미 상상하고 있다.